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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과 영원한 봄을 기리는 칸타타

다락방케이 2019. 1. 3. 19:25


빛과 영원한 봄을 기리는 칸타타

 


                                                                    김만옥

                                                             

 

 

()

 

너무 많은 겨울을 우리는 울 안에서 만났다.

너무 많은 겨울을 울 안에서 만난 반면에

단 한 번의 봄을 이제야 울 밖에서 만난다.

 

우리는 비로소 창문처럼 눈 비비면서,

눈사람이 벗어던진 외투가 우리들 주위의 가장 높은 산을 넘어가는 걸

驚異(경이)의 눈으로 바라본다. 얼음 속에서 흘러나온 ().

 

혹은 針葉(침엽)의 끝에 묻은 겨울의 피를 외면하지 않고

피를 지우는 多感(다감)한 미풍을 피하지도 않는다.

우리는 殷盛(은성)했던 날의 꽃들의 자리마다에서

쌓인 적막을 삽으로 퍼내어

한 줌 햇볕의 집을 만든다.

 

보아라, 하얀 빵과도 같은 이 봄날 아침에

미풍 속에 섞어지는 새들의

완성된 날개 소리…….

 

귀를 열면, 봄의 가장 아름다운 부위인 꽃 속으로

花信(화신)을 읽으려 들어가는 바람의

계단 내리는 쿵쿵 소리도 결코 시끄럽지 않구나.

 

, 어쩌면 그 흔한 자유를 한 번도 만져보지 못하고

만져보지 못하고, 못하고, 못하고……

다락방에 숨겨놓은

無辜(무고)半生(반생)의 흙묻은 장갑.

 

이제금 잘리운 손목이

문득 초록으로 자라올라

너를 찾는 내 눈짓 안에

사랑과 이슬이 함께 깃든다.


 

 

□ Ⅰ


단 한 페이지의 國史(국사) 속에서도 우린

인내와 만난다.

절망과 만나고 희망과 만난다.

우리는 겨울에 긴 잡을 잤지만

우리가 겨울에 긴 잠을 잔 건

조금도 슬픔이 아니다.

 

하늘 끝에 솟은, 보이잖는

우리들 대리석의 支柱(지주), 우리 정신의

번쩍이는 광채를 볼 수 있는 건

다만 우리들 뿐.

 

지게를 지자. 실상 아무것도 없으나

아무것도 없어서 더욱 무거운 代代(대대)로의

지게를 걸머지면,

受侮(수모)와 굴욕의 시대에도 뿔만은 하늘 향한

소를 몰고 나는 빈 들로 나간다.

우리가 과거에 심어둔 일 없는 괭이밥, 황새냉이, 속속이풀, 광대수염……

나의 눈은 불과 천여 평의 아버지의 토지를 一瞥(일별)하고나서

아버지처럼 목잘려나간 金松(금송)숲을 바라본다.

남벌된 금송, 남벌된 목숨, 호두열매의

그대 심장이여, 껍질 속에서 더욱 딴딴한.

 

일어나라 개굴아, 일어나라 일어나라

그대 혼의 顯現(현현)이라.

일어나라 개굴아, 일어나라 일어나라

지금은 입 다물고, 울지 않을 때라

입 속의 그늘에 힘을 둘 때라.

지금은 자라난, 잘리웠던 혀

포플러나무 가지에 잎처럼 걸어두고

푸른 새의 푸른 노래 배우게 할 때라.

 

밭에 있어도 그날 그 거리의 쇠사슬소리

꿈에선 듯 들리고

보습 위에 떨어지는 녹물.

썩은 탄피는 토질을 바꾸고

덜 썩은 탄피는 광활한 들녘에

마을 아이들의 驚愕(경악)을 날렸다.

 

그러나 그 땅을 간다()다는 것은, 갈아서

종자를 심는다는 것은

종자에 대한 우리들의 신앙이다.

콩 심은 데서 콩 따고 팥 심은 데서 팥을 따지 않아도 좋으므로

우리는 우리와 싸우고, 잡초와 싸우고, 토질과 싸우고

모처럼 엽록소를 온 몸에 두른

봄날의 이 異變(이변)의 기후와 다행히 迎合(영합)한다.

 

씨를 뿌리자. 흙내음 맡으며

흙 속에 발목 묻고 씨를 뿌리자.

더러는 골 사이를 타고 흐르는

목소리, 숨소리도 들을 일이다.

 

무더기 무더기 진달래를 꺾어 든

진달래 같은 아이들이 지나가는 산 밑

밭 언덕에서

아내와 말없이 수수씨를 뿌리면서,

손바닥에 햇빛 받아 한 줌 뿌리고

흙 덮고 다시 그 위에 수수씨를 뿌리면서

수수와는 아주 딴 것을 수확할 수도 있다는

틀리지만도 않은 틀린 생각을 하는 건 무엇 때문이냐.

 

죽은 사람들이 깨어남을 위하여,

은방울꽃 같은 그들의 눈을 위하여,

눈 속에 담긴, 안 보이는 하늘을 위하여,

하늘 나는 비둘기를 위하여, 비둘기의

날개의 회복을 위하여.

 

아내와 말없이 수수씨를 뿌리면서

한 번 웃고 한 번은 하늘을 쳐다보았노라.

 

 

 

□ Ⅱ

 

김매는 밭머리에서 개구리만 알 일이다.

가슴, 배 볼록거리는 개구리만 알 일이다.

태양에 눈()물 말리는 개구리만 알 일이다.

 

불타버린 하늘에 타는 또 하나의 불을 두고

아내와 나는 바람을 이야기한다.

일테면, 우리들의 입김 바람 만들어

하늘 한 번 더 태워 火田(화전) 일굴까,

화전에 꽃 심어 꽃밭 가꿀까……라는.

 

듣던 개구리 팔짝 뛰어 하늘 찢더니

태양이 툭 하고 우리에게 떨어진다.

반씩 나눠 어깻죽지에 해를 받쳐들고

아내와 나는 김을 매면서,

괭이밥, 황새냉이, 속속이풀, 광대수염……

모두 매면서,

잔뿌리 하나 안 남기고 모두 매면서, 아내와 나는

불과는 무관한 바람을 이야기한다.

 

바람이 꽃을 가져올 수도 있다니요.”

이야기를 하는 아내의 눈썹 밑에 매달린

눈물방울만한 웃음.

개구리가 그 웃음의 높이대로 뛴다.

펄쩍!

        펄쩍!

펄쩍!

        펄쩍!

 

뛰는 개구리 발바닥 아래서

뛰는 개구리 슬기를 지닌

우리도 개구리라네.

우리도 개구리라네.

 

 

 

□ Ⅲ

 

나는 보았지요, 아저씨.

익은 수수밭 안 뵈는 이랑에

한 쌍의 남녀가 앉아 있었어요.

그들의 애무는 마치

바람 때문에 서로의 몸을 부비는

단풍잎들과도 흡사했어요.

 

너와의 빛나는 입맞춤을 원한다.”

라고, 남자가 먼저 말했어요.

저도 우리가 입을 맞추지 않으면 안 된다는 걸…….”

하고, 여자가 말하더군요.

윗 골에선 제 가슴이 제일 희어요

숱 많은 아랫녘, 텃집도 좋고……

 

개굴개굴개굴개굴 개굴개굴개굴……

 

바람 맞은 수수처럼 달빛을 깔고

한 쌍의 남녀는 나자빠지고,

금시 남자는 죽었으나 여자의 안에서

잠시 후 남자는 다시 소생하고

달도 빙그레 웃으며 얼굴을 돌렸다.

 

개굴개굴개굴개굴 개굴개굴개굴……

 

저는 당신이 그냥 그대로 돌아선 줄 알았는데요,

그런데요 와줬어요 와줬어요 와줬어요. 반가워요.

저는 당신의 귀한 꽃

사랑이 오는 걸 기다렸어요.

이제 우리 씨를 받아요.

심었으니까 받을 수 있을 거예요.

저는 肥沃(비옥)하니까요. 비옥한 흙이니까요!”

 

웃는 양은 니 빠듸도 조코 할기는 양은 눈찌도 곱다.

어허 내 사랑이야!”

 

달빛의 火焰(화염)을 깔고 한 차례 더

수수밭이 바람처럼 쓸리었다.

 

아아, 이 사랑의 냄새…….

슬픔처럼 슬픔처럼

뼛속에 스미네요.”

우리는 이렇게 하나인 걸. 우리는 이렇게……

좋아요 좋아요 좋아요 좋아요.”

개굴개굴개굴……

여자는 윗마을로, 남자는 아랫마을로 떠나고

아주 가버린 것이 아니게 떠나가고

빈 수수밭에서 나와 달빛이

신명나서 신명이 나서 고깔춤을 추었지요.

 

잠시 냇물에 발 푹 잠그고 개구리의 얘길 들으며

담배 한 대 피울 참이나 이렇게 쉬어도 좋으리.

한 쌍이 남녀의 흐르는 피와도 같은

쫄쫄거리는 냇물에 발을 잠그면

문득, 왜 내 귀에 그들의 속삭임이 들려오는지 몰라.

 

안아줘요, 꼬옥!

가슴 사이 구름하늘 다 녹이게요.”

작약꽃잎의 여자의 입술, 내 귀 속에서 비로소 열리고

남자의 뜨거운 팔이 내 老年(노년)을 쓸어안는다.

나의 팔이 나를 쓸어안는다.

 

나의 半生(반생)은 무수한 못이 박힌 각목으로

누군가가 지어준 허름한 집,

세월이 그 못을 모조리 빼어가 버렸으므로

차츰 슬리고,

바람 없는 날 스스로가 세운, 새로운 흙담집의

노년이 지금 이렇게 따뜻하구나.

 

 

 

□ Ⅳ

 

이제 겨울 위해 그 따뜻함 쌓아둘 때라.

건초 더미 곁에 건초 더미만하게

또 하나의 낟가리로 쌓아둘 때라.

 

두 눈에 새벽별 두 개 지니고

낫 들고 지게 지고 밭으로 가면

밭 머리쯤에서 떠오는 눈부신 해를

차마 손 안 가리곤 못 보겠다.

 

개굴아 나오렴, 아저씨가 왔다.”

 

반가운 개구리, 개굴개굴개굴……

팔짝 뛰어 밭으로, 수렁에서 내려서고

琢磨(탁마)의 밤을 지낸 나의 정신은

새로운 낫날로 긴 이랑을 탄다.

 

베어지는 수수의 쓰러짐의 무게,

뿌리보다 더욱 철저하게

땅으로 돌아오는 건강한 머리들.

사랑으로 치자면 속에 가득 향기를 간직한

터질 듯한 가슴, 견고한 여물.

 

모두 다 따뜻하게 자빠뜨리고

천천히 굽은 허리 풀잎처럼 일으키면

보석인 듯 안으로 豊饒(풍요)를 안는 때,

이제는 다만 虛寂(허적)만이 널린

밭의 邊境(변경)에 단풍 그림자 내린다.

누운 수숫대, 내 마음 같이 웃는

입술 그늘에 저녁노을 내린다.

 

그 안온함 뼈 속 스밀 때

가슴에 떠오는 연꽃만한 扶桑(부상).

오랜만에 그런 하늘 한 조각 꽃잎처럼 물고

깃을 찾아 새들이 지나는

비인 밭 언덕에서

 

나는 수수 모가지와도 같은 삶을 생각한다.

키대로의 그의 염원을 생각하고

밤을 지샌 기도를 생각하고,

바람 앞에서 더욱 강인하던 줄기와

줄기의 향일성의 꿈과

시든 잎새의 미래의 춤을 생각한다.

 

우리도 이제 베잠방이 소매 속에

꽹과리 소리 속의 춤을 둘 때라.

아내와 함께 이고 지고 밭둑을 내려서면

지게 위에 내려앉은 저 해를

나는 기꺼이 더 포개어 지고가려 한다.

 

, 책장 넘기듯 하루는 가고

우리 기쁨 속에 섞어지는 寂寥(적요).

닭의 홰 위로 어둠이 오를 때도

저 너메 화전 일궈 꽃밭을 가꾸리라는

나의 결심에는 변화가 없다.

 

그 밤, 귀뚜라미의 것만은 아니고

없는 새벽 없는 이슬, 귀뚜라미의 것만은 아니고

그 쉰 목소리의 울음 또한

귀뚜라미의 것만은 아니다.

 

평화로운 숲의 외곽에 울음우는 귀뚜라미 대신

노래하는 새를 두기 위하여.

제들의 부드러운 뺨을 파아란 하늘에 문지르며

그들이 사랑을 노래하게 하기 위하여.

노래 뒤에 오는 고요를 위하여.

고요의 고요를 위하여.

 


 

□ Ⅴ

 

시련이란, 마치 꽃들의 ()함 위에 내리는

무서리와도 같은 것이다.

인내만이 선과 결속하여

빙결된 시간 바깥으로 서리를 추방한다.

아침의 밝고 빛남은 그리하여

인내와 선의 승리의 선물이다.

 

실상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으면서

가지고 있지 않으므로 가지고 있는

더욱 귀한 선물!

 

오오, 빛의 형상이여.

우리들의 머리 위에 ()처럼 있으면서도

이마에 그늘을 지우지 않고

우리들 몸의 바깥에 있으면서도

속까지 뜨겁게 환히 밝힌다.

 

가까이로는 내 속에서부터 그렇게

나는 끊임없이 빛과 만난다.

내 손이 미치는 범위를 넘어

내 시력이 미치는 한계를 넘어

나는 끊임없이 빛과 만나고,

 

빛으로하여 예측되는 미래를

가을에 만난다.

겨울의 입구에 있으면서도

나는 겨울로 들어가지는 않을 것이라는

기쁜 사실과도 가을에 만난다.

우리는 또 다시 잠을 자지는 않아야하므로.

 

……잠을 자지 않아야하므로 개구리는 웅크리고

겨울을 넘겨 뛸 웅크림의 자세로

내 곁에 있고,

나도 다시 봄으로 가기 위해

낡은 燈皮(등피)의 램프를 오랜만에 손질한다.

 

아내여, 種子(종자)를 꺼내오게.

들여다 보면,

겨울이 한가운데에 앉아 있는

초록 衣裳(의상)

봄이 보이는 가을.

 

가자,

우리가 어디를 향해도 모든 곳에

길이 있고

빛이 있고……

우리가 빛의 길을 따라 나서면

봄도 우리와 같이 빛의 길 따라

우리들을 향해 말()처럼 달려오리라.

 

 





* 1972년작. 편 봄메.


 

시인 김만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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